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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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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
2018.08.29 23:12

2. 새로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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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중에 바울은 그의 메세지에 대한 주요 골자에 대하여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고 말했다. 비록 바울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때때로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단순하고 그리고 단순한 표현으로 진술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신성한 힘에 접근 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구원" 은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모든 것이 포함된 말이다. 그것은 옛 생활로부터 새 생활로의 구조를 의미한다. 이 새로운 삶, 즉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고,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그것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그의 편지에서 가장 유명한 세 부분을 살펴보는 것에 의하여 구원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구원의 의미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그의 가장 좋아하는 상황언어 네 개를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1.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것은 바울의 열렬한 증거이다. 그것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구원" 과 "복음" 두 개를 포함하고 있다.

"구원" 이란 그 배경 안에 두 개의 그림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울이 새로운 삶을 묘사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할 때 하나로 융합된다. 헬라어 성경에서 "구하다" 라는 말은 또한 "치료하다" 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치료받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한 때 한 사람이 병이나서 질병에 걸렸다. 지금 그는 치료받았고 건강을 회복하였다. 또한 구원은 "구조" 를 의미하고 있다. 한 그룹의 사람들이 압제하는 폭군으로부터 속박을 받고 있다. 그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한 위대한 구조자가 왔다. 그리고 자유의 새로운 삶으로 그들을 인도한다.

a. 우리가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병든 상태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었으며, 그가 못들어 오게 막았다. 그러나 이 질병은 암처럼 천천히 우리의 조직을 통하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국면이 영향을 받아왔던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건강을 잃었으며, 자신이 그렇게 병들었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단순한 선한 의지에 의해 자신을 치유할 수 없다. 롬 1:18-32에서 바울은 세상 사람들의 삶속에서 발견된 이 병을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꾸준히 더 나쁘게 되는 동안 우리는 암적인 죄의 성장을 멈출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우리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우리 돕기를 갈망하며 우리를 치유할 수 있는 위대한 의사가 있었다. 그는 우리를 구할 수 있으며, 치유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돕기 위한 허가를 요청하기 위해 왔다. 이것은 "은혜" 라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수술할 것을 허락하는 힘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에게 허락해 주는 것은 우리의 자유, 혹은 책임이다. 우리가 그 위대한 의사의 손에 우리의 삶을 넘겨줄 때 이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무시무시한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발견한다. 이 치료가 구원이다.

b. 바울은 자주 폭군에 의한 속박으로부터의 구조라는 견지에서 구원을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노예, 쓸데없는 습관과 전통에 대한 노예, 옛 생활에 대한 노예처럼 생각된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을 새로운 세계, 혹은 자유의 상태로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을 듣는다. 한 위대한 구조자가 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 구원자가 왔다. 자유롭게 되고 새로운 세계 혹은 상태로 데려가는 것은 지금 가능하다. 이 구조가 구원이다.

바울이 이 메세지를 "좋은 소식" 을 의미하는 "복음" 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뜻밖의 메세지이다. 그것은 깜짝 놀랄만한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조는 가능하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안에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것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항상 이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행복한 특권을 가진 사자로써 자신을 보았다. 그는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해서는 안된다" 라고 말하는 율법 선생이 아니었다. 그는 좋은 소식을 알리는 사람을 의미하는 복음 전도자였다. 그의 설교 주제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였다.
2.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구원, 혹은 새로운 삶은 여기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로써 묘사되었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 못 박혔던거와 마찬가지로 옛 사람과 옛 습관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마지막 말이 아니다. 예수가 죽음을 이기시고 오늘날 살아계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바울이 새로운 삶의 신비스러운 위대함에 대하여 가장 좋아하는 예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그것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더 자세하게 묘사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3,4. 6:1-11을 읽을 것).
이 새로운 삶에 대한 힘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신다" 라는 사실로부터 생긴다. 새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바울은 아직 "이기주의자" 였다. 그는 아직 생각하고, 느끼고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개성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그 속에 살아 계셨다. 불자들은 부처를 위해 이 주장을 만드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회교도들도 모하메트를 위하여 이것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2천년동안 이 간담이 서늘해지게 하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 속에 살아계시는 새로운 삶을 단언한다.
우리는 처음에 비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이것을 무의미한 것처럼 생각한다고 하여 난처해져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같은 말들은 그리스도인의 더 깊은 경험을 묘사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 안에 또 다른 한 분이 살아계신다. 이 분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우리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처럼 실제적이다. 사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친구와의 교제보다 더 친밀하다. 어려운 날들을 위한 우리의 능력,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기 위한 우리의 영성, 그리고 우리가 길을 잃게 되었을 때에 필요한 우리의 용기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이 우정으로부터 온다.
3. 엡 2:8-10.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개종전에 바울은 유대 종교에 대한 엄격한 추종자였다.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유쾌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다른 말로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천천히 그는 진정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와 구조에 대한 복음을 배우게 되었던 요점이 이것이었다. 이 구절에서 그는 은혜의 방법과 선행의 방법, 즉 하나님의 선물로써의 구원과 인간의 업적에 의하여 얻는 구원을 가능한 가장 날카롭게 대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선물로써의 구원과 인간 업적으로써의 구원 사이의 대조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선행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선행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불필요하고 중요하지 않는 것인가?
바울은 여기서 이 중요한 질문을 취급한다.
1.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역할이 먼저이고 가장 중요하다. 이것은 "은혜" 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기 전에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한 바울의 단어(말)이다. 사람의 역할은 믿음이다. 만일 사람이 "예" 라고 말하는 것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반응한다면, 즉 마음의 문을 연다면 그가 구원받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교제가 두 인격 사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재판관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가장 가까운 예는 아이를 성장시키기 위한 현명하고 자비로운 아버지란 것이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업적이 아니다. 그것은 일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그의 힘과 선행을 자랑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선행을 자랑한다는 것은 가장 나쁜 악의 형태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가 감사함과 겸손함으로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일하여 얻을 수도 없고, 받을 가치도 없다.
3. 우리가 자신의 선행에 의해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찌라도 선행은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선물로써 보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과일 나무가 과일을 생산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한다. 그리고 이 과일들은 우리 속의 새로운 삶에 대한 결과, 혹은 영향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맹고들이 적당한 시기에 살아있는 나무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선행에 의한 열매는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만일 나무가 죽었다면 맹고들은 성장하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나무이다. 또한 이 방법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은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원을 말할 때, 바울은 자주 그의 독자들과 청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상황언어를 사용하였다.

1. 칭의(롬 3:23-25). 이 단어는 법률재판소로부터 취한다. 그 상황은 판사 앞에 서있는 죄인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은 유죄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벌받을 것을 안다. 그러나 그의 유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유를 얻었다. 비록 그가 유죄일 찌라도 그는 죄가 없는 것처럼 인정받았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관계를 비인격적인 법률에 의하여 판결하는 인간판사와 같지 않다. 그는 월등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다. 그는 용서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본성은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칭의는 아버지의 마음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써 구원을 묘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죄의 방해하는 힘으로부터의 인간 자유를 말한다.
2. 속죄(롬 3:23-25). 이 단어는 노예시장으로부터 취한다. 바울 시대의 노예시장은 오늘날 어떤 나라에 있는 가축시장처럼 통상적이었다. 그 노예는 주인에 의해 묶여서 속박되어 있었다. 그는 동물처럼 살고 팔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관대하고 부유한 사람이 노예시장에 나타나서 노예를 산다. 그리고 그에게 자유를 준다. 속죄의 값을 지불하는 것에 의하여 그 관대한 사람은 그 노예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유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 방법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것을 사용한다. 관심과 너그러움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우리에게 온전한 새로운 삶을 열어주셨다.
3. 화해(고후 5:17-20). 이것은 우정의 경험으로부터 취한 단어이다. 화해했다는 것은 우정이 깨어진 후에 다시 우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우정이 깨어진 것을 겪었던 두 친구가 있다. 만일 상처를 입은 친구가 다른 친구를 책망했다면 화해가 불가능하다. 만일 상처를 입은 친구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다면, 더 이상 깨어진 우정에 관하여 관계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상처를 입은 친구가 기꺼이 상처를 참는다면, 계속 좋아한다면, 용서하는 태도를 유지한다면, 아직 우정을 개선하고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발생되었던 것임을 정확하게 말한다. 비록 우리가 그와의 우정을 깨뜨리는 것에 의해 그에게 상처를 입혔을 찌라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그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용서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친밀한 우정의 삶을 다시 가능하게 만들었다. 화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우정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
4. 양자(갈 4:3-7). 이 단어는 가족으로부터 취한 것이다. 그 상황은 한 노예를 법적인 아들과 아버지 재산의 상속자로써 가족관계 속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이 조건을 가져올 수 없다. 깊은 관심과 큰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실제적인 아들로써 살 수 있다. 우리는 그에게 속한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아버지" 라고 부르짖는다(롬 8:12-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이 훌륭한 색으로 그려질 때, 반드시 한 가지 질문이 우리의 마음에 떠오른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삶이 같은 그리스도인에게도 있는가? 혹은 이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종교적 경험인가? 우리가 개종하고 하나님과 우정 안에서 살기 시작한 후에도 실패와 패배와 죄를 경험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이러한 열렬한 교제 관계를 묘사하기 위해 이것을 진술한 것인가?
바울은 구원의 위대함을 말할 때, 붓과 함께 오직 흰색과 검정색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처럼 한다. 이와 같이 그 대조는 그의 가장 예리한 색들, 즉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옛 사람으로부터 새 사람으로, 속박으로부터 자유로 그리고 육체적인 삶으로부터 영적인 삶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평소에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이미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의 실패와 죄를 실제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는 흰색, 검정색과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회색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옛 생활과는 차이가 크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현재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더 많은 어떤 증거들이 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고,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시작이며, 우리가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우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 화해된 것을 의미한다.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맏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
느니라"(롬 8:23; 롬 8:19-25을 읽을 것).
바울의 가장 유명한 절 가운데 하나에서(롬 7:13-25),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계속되는 내적 갈등을 묘사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함이라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위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하게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 갈등을 묘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통찰력을 가진 많은 이들이 이 내적 갈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간 이래로 격렬하다는 것을 동의한다. 전에는 마음이 우둔하고, 어둡고, 감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과 본능적으로 행하는 일 사이의 대조에 대하여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 이유 때문에, 새로운 삶을 발견하고 자유를 목격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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